2003년10월3-4일 지리산 일일왕복 (성삼재-천왕봉-성삼재) 단독산행

(날씨 : 맑음)

산행 시간표

성삼재 4:18
노고단 4:55-5:00
연하천 7:55-8:05
벽소령 8:56-9:05
세석산장 11:18
장터목 12:27-47 (점심)
천왕봉 13:41-50
장터목 14:28-35
세석산장 16:05
벽소령 18:50-19:00
연하천 21:15-50 (저녁)
노고단 3:20
성삼재 4:10
(총 23시간52분)

지리산의 소위 완전 종주는 화엄사-노고단-천왕봉-대원사 까지를 말한다. 모 산악회에서 지리산 완전 당일종주를 걸고 모집하길래 힘들겠지만 하면서 신청을 했다. 그랬더니 출발 몇일전 연락이 왔다. 취소합니다. 지원자가 워낙 없어서요. 이랬을 때 나에게 떠오른 욕구-생각이 있었다. 지리산 왕복종주를 하자! 원래 지리산 왕복종주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몇년 전 백두대간을 다닐 때였다. 나와 함께 3년 내내 백두대간 산행의 선두에 섰던 등반대장 장헌수 형이 몇년전 지리산 당일 종주를 하다가 천왕봉에서 갑자기 결심을 하고 노고단을 향하셨고 19시간반 걸려 왕복종주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 후 헌수 형의 지리산 왕복종주는 나에게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한편 출발하는 날은 어머님께서 돌아가신지 1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래 숙연한 마음으로 혼자 지리산 밤길을 걸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성삼재-천왕봉-중산리로 가는 산악회의 버스를 탔을 때 종주를 처음하는 박 선생이 같이 가자며 옆에 타서..... 오늘은 좀 빨리 가야하니 따로 갑시다. 길도 가이드도 좋고 하니 별문제가 없을 겁니다. 혹시 내가 안 오면 산악회에다 다른 곳에 갔으니 찾지 말고 버스 떠나라고 전해주세요.

며칠 전 작년초에 나를 수술해 준 이춘성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올 8월에 진료 한번 받으라고 했는데 안갔다. 지금이라도 받을까? 나, 어제도 러닝머신에서 10 킬로미터를 뛰었단다. 그래? 그러면 오지 말아. 지리산 가기 전 러닝머신에서 연습한 효과로 스타트 후에 신바람이 났다. 몇 명과 같이 걷는 야간 산행은 정말 순조로왔다. 쌀쌀한 날씨가 땀도 덜나게 하고. 그렇게 몇년 전보다도 빨리 비교적 더 수월하게 천왕봉에 오를 수 있었다. 물론 힘드는 산행이었지만 좋은 날씨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산행이었으니까. 그러다가 세석을 지나 벽소령으로 향하는 데 점점 힘들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만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덕평봉에서 마침 반야봉으로 지는 해를 쳐다보게 되었다. 반야낙조라더니..... 아름답구나! 엉덩이를 연상시키는 반야봉 실루엣 옆으로 마침내 해는 사라져 버렸다. 이후는 점점 추워지고 지쳐갔다. 내가 이 먼 길을 왔던가? 속도는 점점 느려졌지만 마음은 평안했다. 너무 일찍 가도 성삼재에 차도 없을 걸..... 완전히 어두어졌을 때 벽소령 산장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60세 이상만 주민등록증 갖고 줄 서세요.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매점 앞에서 무척 긴 줄이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니 컵라면을 사먹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찬물에 비상식량 떡만 여러개 먹은 지 15시간 째이다. 아, 따뜻한 국물과 맥주가 먹고 싶다! 연하천에는 맥주가 있었다는 기억을 되새기고 천천히 걸어갔다. 몇몇을 만났는데 모두들 아, 혼자서 가세요? 어디서 와요? 저, 천왕봉에서 와요. 연하천 산장도 꽉 찼는데요. 라면만 먹으면 되요. 과연 연하천 산장 마당에는 비박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래도 컵라면과 맥주를 사먹을 수 있었다. 야간 산행은 금지입니다. 정 가시려면 우리가 잘 때쯤 슬그머니 떠나세요. 식사와 휴식 후 랜턴을 끄고 슬그머니 연하천 산장을 빠져나왔다.

성삼재에 아침에 도착해야 차를 탈 수 있는 있는 나에게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 한편 야밤의 홀로 천천히 걸어가는 지리산 산행이 그런대로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연하천서부터 노고단을 향하는 나는 점점 지쳐왔다. 가끔 누우면 수많은 별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곤 했다. 마침내 점점 추워지고 졸음이 쏟아졌다. 잠이 들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나는 나자신를 믿었었다. 잠깐 누웠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는 무슨 꿈까지 꾸었다.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니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미 다리가 무거워진 나는 시속 1.5킬로미터 정도로 자주 앉아서 쉬기도 가끔은 눕기도 하며 걸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임걸령에 도착하니 갑자기 팔다리에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신기했다. 정신적인 희망감인지 아니면 체력이 다시 축척이 된 것인지..... 노고단 근처에 가니 새벽산행을 시작한 팀들을 만났다. 첫번째 팀은 30분이나 남은 노고단을 5분 남았다고 나를 위로하였다. 다음 팀은 15분 남은 노고단을 역시 5분 남았다고 나를 부추겼다. 그리고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노고단에 오르니 진한 안개-구름 속에 갇혀버렸다. 도저히 노고단 산장으로 내려가는 지름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래서 밝은 랜턴이 필요한 거구나..... 하는 수 없이 난간을 잡고 도로를 따라 우회하여 산장을 향했다. 그 후 노고단 산장에서 성삼재로 향하는 나는 점점 더 고통스러운 발걸음으로 간신히 내려왔다. 새벽에 덜덜 떨면서 올라오는 택시를 기다렸다. 졸음과 추위가 진한 고통으로 다가왔던 시간으로 기억이 된다. 그래서 이번 산행은 기쁨보다는 고통을 꽤 많이 준, 시적이지도 않고, 건강 테스트 산행도 아닌 그야말로 즉흥적이고 자학적인 산행이 아니었었나 생각된다. 그래서 다음의 준비되고 즐거운 합동 왕복종주 산행을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