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락당 일곽(獨樂堂 一廓)에 관한 연구 1984

독락당 일곽(獨樂堂 一廓)에 관한 연구 1984

(대한건축학회지 1984년12월호와 1985년2월호, 정회원 김관석)

* 본 논문과 사진의 무단 전재를 금하오니 양지해주시기 바랍니다 *

 

1. 머리말

전통(傳統)이란 소중하기 때문에 선조로부터 물려받고 또 받아야 하는 신념, 관습 등의 그 무엇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이제까지 '고(古)건축' '전통(傳統)건축' '전래(傳來)건축'등으로 불리어 온 건축물등은 그냥 존재함으로써 고건축, 전래건축이 될 수 있으나 전통건축이 되려면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떠한 가치를 발견하여 소중히 여기게 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본 연구는 16세기 초에 지어졌으며 조선조의 명현인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이 짓고 수년간 생활하였다는 獨樂堂(보물 413호)과 이를 포함한 주거일곽(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 1600번지)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독락당 일곽을 실측하여 도면화하고 이곳의 내력과 유관사항들을 조사함으로써 전래건축에 대한 앞선 실측조사연구들과 같이 광역적이지는 못하나마 자료축척에 기여하고 그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전통이해의 단서를 찾고자 한다.

2. 실측, 조사 과정

1) 준비과정

1978년에서 1984년 봄까지는 몇차례 걸쳐 연구목적을 갖지 않고 옥산리(玉山里)에 있는 독락당일곽, 옥산서원(玉山書院) 정혜사지탑(淨慧寺址塔) 등을 답사했다. 이때 촬영한 슬라이드가 나중의 조사 분석에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독락당의 현주인과 만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선입견없는 관찰을 통해 이곳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상상하였었다.

2) 실측 과정

현주인을 만나 후 연구를 계획하고 1984년 6월 일차 윤곽측량을 한 후 세부의 파악과 사각평행투시도(OBLIQUE)의 작성을 위해 몇차례의 현장 스케치와 사진 촬영을 하였다. 1/25,000 지형도와 실측된 도면과의 관계는 1/1,200 '독락당 보전구지도'을 참고하였다.

3) 인문 조사

먼저 현주인을 비롯한 마을 인사들과의 면담으로부터 조사를 시작하였다. 현주인 이해철(李海轍) 종손은(문구 일부 수정) 1949년생으로 할아버지<이지락(李志樂):1910-1964>의 시중을 들면서 독락당 사랑방에서 생활하였는데 그때 알게된 이곳의 내력에 관하여 몇차례의 면담과 서신왕래를 통해 많은 증언을 함으로써 본 조사에 주축이 되는 자료를 제공했다.

문헌자료로는 독락당을 복축한 회재 이언적(1491-1553)의 문집과 노계 박인로(蘆溪 朴仁老)(1561-1642)의 시가'독락당'을 비롯하여 독락당과 계정에 걸려있는 20여개의 편액들 그리고 여강이씨세보(驪江李氏世譜)를 들 수 있다.

독락당과 마을에 있다는 귀중본들은 참고할 기회가 없어 추후연구의 대상으로 남겨 놓았다.

3. 조사 내용

1) 옥산리

[1] 명칭 : 신라시대에는 '옥천동(玉泉洞)'이라 했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옥산리라 불리우게 되었다.

[2] 구성 : 옥산리에는 세분하여 보면 독락당이 있는 계정마을(상리)와 그 남쪽에 옥산서원이 있는 서원(원촌)이 중앙부에 있다. 그 북쪽으로는 도화동(桃花洞), 민내마을이 있고 남쪽으로는 섬 중보, 낙삼거리 등으로 불리우는 마을이 있다.

[3] 주민 : 옥천동 시대에는 경주 설씨들이 살았다 하며 조선 중기에 여주 이씨들이 들어와 살게되었다 한다. 지금도 남쪽 마을에 설씨들이 일부 살고 있다. (이주홍씨 담)

[4] 풍수 : 이곳은 풍수에 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인근 풍수가인 손종익(孫琮翼) 옹에 의하면 독락당일곽을 중심으로하여 서북의 도덕산(道德山)이 주산, 북의 안태봉(安胎峯)이 그 보조산, 동의 어래산[화개산] (魚來山 [華蓋山])이 되고 청룡, 서의 자옥산(紫玉山)이 백호, 남의 무릉산[무학산[(武陵山[舞鶴山])이 안산이 되고 있으며 같은 군에 있는 양동리와 같은 길지는 못되나 나쁜터는 아니라 한다.

2) 독락당 일곽

1] 내력 : 옥산리에 회재의 아버지인 이번(李蕃)(1463-1500 논문오류 수정) 소유의 정자가 있었다고 하며 회재의 유일한 혈손인 둘째부인의 아들(문구 수정) 잠계 이전인(潛溪 李全仁)(1516-1568)이 태어나기 전해인 1515년에 생모 양주 석씨의 재력으로 안채와 숨방채(행랑채)가 지어졌다는 전언이 있다. '회재선생행장'(晦齋先生行狀)(이황(李滉) 찬(撰),1566) 및 기타 기록에 의하면 독락당은 회재가 42세때(1532)에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 파직당하여 고향으로 내려와서 양동리 소재의 본가인 무첨당(無畤堂)(사랑채의 당호)과 별업(별서, 별장}으로서 복축한 것 이며 계정은 47세때에(1537)에 지은 '임거십오영(林居十五詠)' '징심대즉경(澄心臺卽景)' 등의 시와 그가 명명한 사산오대의 이름들이 전해오고 있다. 그후로 잠계 17세손(논문오류 수정)에 이르렀다.

독락당의 주위환경

독락당 일곽 평면도

2] 안채 : 주부(안방), 며느리(머리방), 할머니(안사랑), 아이(서녘방)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한다.

안사랑과 빈소방은 전에는 결혼한 장남이 거처하는 작은 사랑의방과 마루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사랑 남쪽 바깥벽에 '역락재(亦樂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남쪽 세칸의 창문은 샛마당으로 통하는 마구간이었다. 정지 안방 안대청은 6.25사변때 타서 개축한 것이다.

3] 독락당(사랑채) : 주인이 거처하던 곳이다. 현재의 상태를 보면 동쪽 두 칸의 마루는 별도의 마루방이였던 것 같다. 보물 413로로 지정되었으며 현재의 단청은 문화재 보수공사할 때(1976-1978)에 칠해진 것이다. 1930년경의 사진에는 단청이 보이지 않으나 16C 후반에는 단청이 있었던 것 같다. 대청에는 [독락당] [옥산정사(玉山精舍)] 의 현판이외에 방문객들에 의한 시문, 기문이 써있는 15개의 편액들이 걸려있다.

4] 계정(溪亭) : 주인의 정자이다. 1620년경 소실된 것을 1650년에 복축한 것이다. 현재의 막새기와는 보수공사 때에 생긴 것으로 이전에는 없었다 한다. 마루 남쪽 안벽에 '계정' 온돌방 바깥벽에 '양진암(養眞庵)' 헌감에 '인지헌(仁智軒)' 등의 현판과 마루위에 11개의 편액들이 걸려 있다.

5] 사당(社堂) : 잠계가 건립하여 회재의 신위를 봉안하였다가 1566년에 양동의 본가로 신위를 옮기게 되었고 잠계 사후 장자 이준(李浚)(1540-1623)에 의해 잠계의 신위를 봉안하고부터 사대봉사를 위한 신위를 봉안해 온 곳이다.

6] 어서각(御書閣) : 어서각기에 의하면 인종이 회재에게 보낸 수필답서를 보관하기 위하여 1835년에 세워진 것이다.

7] 숨방채(행랑채) : 동쪽 숨방에는 청지기들이 거처했고 서쪽칸에는 말들이 있었던 곳이다.

8] 공수간(供需間) : 노비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대문밖 서쪽 논자리에도 공수간이 있으며 대문쪽으로는 노비들이 사용하는 측간이 있었다 한다. 현재의 신식 기와지붕은 원래 한식 기와지붕이었다가 초가지붕으로 된 것을 보수공사하면서 바꾸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9] 담 : 보수공사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방식으로 쌓았다. 이전에는 바깥마당과 뒷마당을 구획하는 담과 공수간마당 동쪽담이 있었으며 전자의 담과 동쪽 외곽담의 가운데 있는 숨방채로부터 시냇가로 통하는 곳에는 각각 소문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10] 기타 : 독락당 뒤에는 회재 기거이래의 약쑥밭이 존속하고 있다. 안채 뒷마당에도 대나무밭이 있었으나 근래에 없앴다. 그밖에도 회재가 심었다는 주엽나무(안채 뒷마당)와 향나무(독락당 마당)이 있다. 또한 정지 서쪽 마당에 우물이 있었으나 현주인 몇대 전에 북쪽 송림뒤로 옮겼다고 한다.

관어대(觀魚臺)

탁영대(濯纓臺)

징심대(澄心臺)

세심대(洗心臺)

정혜사지(定惠寺址)

사자암(獅子巖)

3) 주위 관련 환경

1] 사산 : 독락당 주위의 산들로 앞의 풍수에서 말한 도덕산(道德山), 화개산(華蓋山), 자옥산(紫玉山), 무학산(舞鶴山) 등이다.

이중 자옥산은 옛부터의 이름이며 나머지는 회재가 명명한 이름들이다.

2]오대(五臺)

* 관어대(觀魚臺) : 계정을 받치고 있는 시냇가의 반석

* 영귀대(詠歸臺) : 관어대 동쪽 언덕에 묻혀있는 큰 바위 (논문오류 수정)

* 탁영대(濯纓臺) : 탁영대 북쪽 약 150m 떨어진 냇물에 낮으막한 폭포를 이루고 있는 바위

* 징심대(澄心臺) : 관어대 북쪽 약 300m 떨어져 있고 지금은 콘크리트로 된 낮은 둑에 의해 물이 고여있는 시냇가의 바위

* 세심대(洗心臺) : 관어대 남쪽 약 600m 떨어진 시냇가의 바위. 여기에 '세심대'라고 새겨져 있다

3] 옥산서원(玉山書院) : 세심대 동남쪽 옆에 있다. 1573년 회재를 봉향하기 위해서 향인들이 지었다

4] 정혜사지(定惠寺址) : 독락당 서북쪽 약 300m에는 정혜사지탑(국보40호)이 있다. 정혜사는 신라 고찰로서 회재가 드나들며 학문을 닦은 곳이다.

5] 기타

* 자계(紫溪) : 오대를 연결하듯이 흐르는 시내

* 연당(蓮塘) : 관어대 동쪽, 영귀대 북쪽에 있는 네모진 연못 (논문오류 수정)

* 조기(조磯) : 관어대에서 자계 건너편으로 있는 낚시터였다는 곳

* 송림(松林) : 독락당 일곽 북쪽의 회재가 심었다는 소나무 숲

* 죽림(竹林) : 독락당 일곽의 동쪽 자계 건너편 언덕에 있는 대나무 숲으로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 용추(龍湫) : 세심대와 그옆 폭포 아래에 있는 수심이 깊은 자계의 일부

* 호암(虎巖,범바위)과 사자암(獅子巖) : 징심대 북쪽 약 150m 지점의 자계 동쪽 언덕의 바위(호암)와 그 북동쪽 약100m 떨어진 콘크리크 댐에 묻혀버린 바위(사자암) (논문오류 수정)

환경 <사진1>

시점(a)에서 <사진2>

시점(b) <사진3>

시점(c)에서 <사진4>

시점(d)에서 <사진5>

시점(e)에서 <사진6>

5. 체험의 계층적 분석

1)장면

* 환경 : 구불구불한 길을 가다 나타나는 독락당 일곽의 모습에서 솟을대문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옆으로 긴 띠모양의 담을 일차적 배경으로 하고 그위로 숨방채 안채 공수간의 지붕들을 이차적 배경으로하여 솟아있다. 여기서 담 전체의 중앙부로부터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는 솟을대문 중앙지붕의 좌상부와 외곽담의 좌상부을 연결하고 대문 중앙지붕 우상부와 외곽담의 우상부를 연결하는 삼각형의 안에 이차적 배경이 있다. 이러한 삼각형의 모습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꼭지점 부근(솟을대문 중앙부)으로 시선이 끌린다. <사진1>

* 시점(a)에서 : 이 집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만이 이 자리에 서게된다. 여기서는 대문이 장면의 중심부에 오게되어 더욱 주목하게 되는데 여름에는 대문앞 두그루의 벗나무에 의해 거의 다 가려지고 좌우의 논밭과 대조적인 접근로와 그 종착점으로 시선이 끌린다. <사진2>

* 시점(b)에서 : 대문 앞에 서게되면 열린대문 사이로 문간보다 밝은 안의 모습에 주목하게 된다. 그곳에는 공수간마당의 담과 공수간 지붕 그리고 공수간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의 지붕이 조금보인다. <사진3>

* 시점(c)에서 : 대문을 들어가 문간마당에 서서 바깥마당 쪽을 바라보면 양쪽가의 담사이로 숨방채가 보인다. 여기서 오른쪽 위로 독락당지붕의 일부가 보이고 열린 문간을 통해 샛마당 동쪽담이 보이며, 왼쪽 중앙부에는 땅바닥의 완연한 통행자국이 샛마당 담 뒤로 사라지고 있어 그 종착점으로 시선이 끌린다.<사진4>

* 시점(d)에서 : 內大門과 안채의 문들이 열려진 경우에는 문틀속에 문틀이 보이고 이런 어두운 이중 문틀속에 보이는 안대청에 주목하게 된다. 대청의 남쪽 창호지문과 북쪽의 판문이 열리면 다시 어두운 대청을 통해 멀리 보이는 뒷담에 주목하게 된다. <사진5>

* 시점(e)에서 : 독락당 대청에서 동쪽 창을 열면 창문틀 사이로 담의 살창이 보이고 그 살창사이로 보이는 나무와 냇물에 주목하게 된다. <사진6>

* 시점(f)에서 : 계정마당에서 자계 건너편을 바라보면 계정마루라는 비교적 어두운 틀을 통해 밝은 건너편 경치에 주목하게 된다. <사진7>

* 재료와 형태 : 멀리서는 정돈된 윤곽을 갖는 형태로서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이러한 윤곽에 근사할 뿐이고 각각 불규칙한 모양을 한 재료들로서 보인다.

2) 전체적 구성

* 배후에 대한 암시 : 원경에서는 숨방채지붕의 용마루선 위로 안채지붕 용마루 선이 보이고 숨방채지붕의 왼쪽으로 안채지붕의 일부가 보이고 시점(a)에서도 안채지붕의 일부가 더욱 뚜렷하게 보여 숨방채 뒤로 구성를 암시받는다. 독락당에 대한 암시는 문앞에 이르러야 숨방채 왼쪽 위로 보이는 지붕의 일부에 의해 받게 된다.

* 구성 좌표축 : 환경에서는 긴 띠모양의 담위로 보이는 지붕들은 서로 중첩되고 있어서 평행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점(a)에서 보이는 것처럼 담과 비스듬하게 만나는 통로의 종착점에 있는 대문과 그 오른쪽 담은 통로축에 대해 수직에 가까워지도록 틀어져 있다.

또한 시점(b)에서 보이는 숨방채 지붕도 대문과 평행하다. 그래서 환경에서 보이는 대문의 왼쪽 담과 그위의 숨방채와 안채의 지붕들이 이루는 직교축이 기본적 좌표축을 형성하고 대문과 그오른쪽 담 그리고 공수간은 시계방향으로 약간 틀어진 근사적 좌표축을 형성한다. 이러한 기본적 좌표축은 원경에서 지붕 위로 보이는 안태봉과 이 집의 남쪽으로 바라 보이는 무학산(현재 무릉산)을 잇는 축방향과 일치한다.

* 자연환경적 영역 : 독락당 일곽을 포함하는 평지와 그 주위의 산기슭들이 대영역을 형성하고 이곳이 옥산리 구역이 된다.

또한 남쪽으로 보이는 화개산(현 어래산)과 자옥산의 지맥과 서원마을을 가리는 숲에 의해서 동서의 산기슭에 의해서 그리고 북쪽의 도덕산 기슭과 독락당 일곽뒤의 송림에 의해서 한정되는 평지는 소영역을 형성하고 이곳이 계정마을구역이 된다.

2. 체험의 계층적 분석

1) 생활목적의 구성

1] 입지 : 옥산리와 양동리는 안강평야를 사이에 두고 경주로 통하는 길이 나누어 지고 있으며 경주까지의 거리가 비슷하다. 그래서 옥산리는 회재가 경주교관이었던 시기(1515 - 1517)에 양동리 본가와 별도로 소실 양주 석씨와 생활하기 위한 장소로는 적합하게 보인다. 그밖에 아버지 소유의 정자(현 계정)가 있었으며 14세때에 산사에서 공부하였다 하므로 부근에 정혜사가 있는 그곳은 회재의 은거지로서 좋게 여겨진다.

2] 배치에서의 풍수적 고려 : 독락당 일곽 동쪽의 자계는 청룡이요 서쪽의 도로는 백호라 할 수 있어 좋으나 북쪽이 비어서 좋지 않아 송림으로써 현무를 보충하고 있다. 이곳은 임좌병향으로서 선방하고 있어 '황천살(黃泉殺)'에 해당되니 금지하는 바이다. 또한 대문, 주방(사랑방 또는 안방), 정지의 관계를 보면 '선문건주건조(선門乾主乾조)' 의 <화해택(禍害宅)>이 되어 피해야 할 배치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풍수에 대한 고려는 사산에 의한 영역의 설정과 좌표축의 설정 정도에 그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생활관습에 따른 구성 : 대문앞에 서게 되면 왼쪽으로는 논자리에 있던 집밖 공수간 문이 있었다 하는데 이곳에서 문간을 통해서 보이는 것은 집안의 공수간일 뿐이며 숨방채는 보이지 않는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서 숨방채가 보이게 되면 여자들의 통로는 서쪽으로 멀리 돌아가도록 암시만 되어 있고 독락당으로 통하는 문은 명확히 보이며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다.

숨방채 중앙부의 內大門은 혼례 때에만 개방하고 샛마당을 노비들의 생활장소로 사용하여 안채에 기거하는 여주인의 생활장소와 구분하고 있다.

한편 독락당으로 통하는 안채와 동쪽문간을 열더라도 독락당의 벽밖에 보이지 않도록하여 남녀의 생활장소를 구분하고 있다. 또한 안채 서쪽의 바깥마당에도 가로지르는 담으로써 여주인과 하인들의 생활장소를 구분하였으며 대문밖 공수간 입구에는 하인 전용 측간을 두었었다 한다.

안채의 안사랑과 빈소방(殯所房)에는 샛마당과 독락당마당으로 통하는 문 창문이 있다. 이것은 독락당 건립이전의 사랑방과 사랑대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사랑과 빈소방은 지금의 용도와 다르게 결혼한 아들이 거처하는 작은사랑과 이에 딸린 대청으로 사용되고 그래서 안마당쪽으로는 내소한 문이 있고 샛마당과 독락당쪽으로는 개방적인 문 창문이 있다고 짐작된다.

4] 회재의 생활목적에 따른 구성 : 독당당은 회재의 은거생활 위한 곳이므로 원경에서는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대문밖 공수간이 있었을 때 경우에 따라서는 숨방채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독락당은 대문으로부터 가까우면서도 안채와의 연결이 가능한 일상적 생활의 장소가 된다. 계정은 독락당과 접하고 있으며 자연환경과도 접하고 있는 비일상적 생활의 장소가 되는데 여기서 송림 정혜사와 관어대 자계로 곧바로 나갈 수 있다. 독락당에서는 창문을 열면 자연의 경치가 바라보이고 계정에서는 자연환경에 개방되어 항상 자연의 풍경이 바라보이고 오대에서는 자연속에 있게된다.

회재는 평소에 독락당에서 독서하다가 자연을 바라보고 싶을 때는 살창사이로 내와 고기를 쳐다보기도 했을 것이다. 계정에서는 객과 혹은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자연을 감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집안에서 약쑥을 뜯고 꽃밭을 가꾸기도 하다가 집밖으로 나가서는 죽림에서 대나무를 잘라 조기에서 낚시하고 관어대에서는 물고기를 보고, 영귀대에 올라가서 시를 읊고, 탁영대에서는 갓끈을 풀어 땀을 식히고 세심대에서는 떨어지는 폭포를 보고 잡념을 떨어버리고 징심대에서는 고요한 수면을 보고 마음의 평정을 찾았을 것이다.

가끔은 도덕산 자옥산 화개산 무학산을 올라다녔으며 돌아와서 사랑방에서 곤히 잠을자고 또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으리라. 또한 정혜사를 찾아가 중들과 담론하기도 하고 그들이 양진암(계정)에 찾아오는 일도 있었으리라.

독락당 일곽 투상도

독락당 일곽 단면도

2) 공간 - 형태의 구성

1] 배치 : 안마당은 대지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ㅁ'자형의 안채로써 둘러싸이고 다시 바깥마당 뒷마당 독락당마당을 구획하는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기서 서쪽담은 외부도로의 방향에 따르고 동쪽담은 자계의 방향에 따라서 기준좌표축(좌향)으로부터 조금씩 틀어져 있다. 이러한 'ㅁ'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숨방채의 배치는 안마당을 주위 환경으로 강하게 차단시키는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자형의 독락당은 서쪽으로 안채와 붙어있고 지붕도 겹쳐있으면서 안채의 좌표축에 따르고 있는데 동쪽으로는 동쪽 외곽담으로 접근하여 계정으로 가는 통로만을 남기고 있다.

'ㄱ'자형의 계정은 관어대 위에 위치하면서 동쪽담과 같이 자계의 흐름과 일치하는 좌표축에 따르고 있다. 여기서 계정과 계정마당이 만나는 선들이 동쪽담과 북쪽담의 연장선이 되고 있어서 계정은 외곽담밖으로 붙어 있는 격이 되었다. 그밖에 사당은 계정의 좌표축에 따르면서 그 서쪽에 있고 어서각은 안채의 뒷마당에 있으면서 계정마당을 전면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들은 먼저 계정이 관어대 위에 자리잡고 그후에 안채와 숨방채가 주위의 지세에 따라 좌향을 정하면서 앉혀지고 다음에 독락당이 안채와 계정의 위치에 따라 지어지면서 일부의 담이 생기고 또 다시 이런 상황에 맞게 사당, 어서각, 대문과 공수간 그리고 외곽 담이 형성된 결과일 것이다.

2] 위계 : 안채와 숨방채에서는 앞(바깥마당쪽)에서 뒤(뒷마당쪽)로 갈수록 지면과 기단이 높아지고 이에 따라 지붕도 높아지는데 안채의 북쪽간은 삼량식(三樑式)의 다른 간보다 보의 간격이 넓은 사량식(四樑式) 가구(架構)로 되어 있으며 치장도가 높다. 독락당은 안채의 북쪽열보다 큰 오량식 가구로 되어 있으며 원주(圓柱)를 사용하고 초익공식(初翼工式) 공포(拱包)를 짰으며 지붕의 서쪽부분은 팔작지붕으로 되었고 단청(丹靑)을 칠하는 등 더욱 치장도가 높다. 사당과 어서각도 간살이 규모는 작으나 치장도가 높아 단청이 칠해져 있다. 계정에는 원주와 각주가 혼용되었고 풍혈이 있는 계자난간(鷄子欄杆)을 설치하는 등 비교적 치장도가 높다.

3] 전이 : 밖에서 안으로, 바깥마당에서 독락당안마당 문앞마당 샛마당 안마당으로, 독락당마당에서 안마당으로 들어갈 때에의 문간들은 성격이 다른 장소들의 공간 - 형태의 급격한 변화를 막으며 통행의 속도를 늦추는 매개적 공간 - 형태가 된다. 대문간과 바깥마당 사이에 있는 문간마당도 그러한 성격의 것이며 마당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중간의 쪽마루도 매개적 공간 - 형태가 된다.

한편 안마당, 독락당마당, 계정마당에서 안방 사랑방 양진암으로 들어가는 가운데의 안 대청 독락당 대청 계정마루는 연결만 유연하게 하는 매개적 장소일뿐만 아니라 자체가 마당 방과 같은 생활장소인 매체적 공간 - 형태가 된다. 매체적 공간 - 형태로서의 마루들은 폐쇄도 개폐가변도에 있어서 마당과 방의 중간적 성질을 나타낸다. 또한 독락당 동쪽담 밖에서 윗쪽으로는 담밖으로 나와있는 계정과 아랫쪽으로는 담밖으로 나와있는 외측에 의해서 또한 독락당의 동쪽담과 자계 건너편 언덕으로써 한정되고 있는 곳은 독락당일곽과 외부의 자연환경사이의 매체적 공간 - 형태를 이루고 다시 그곳과 계정마당 양진암사이에서 계정마루가 매체적공간 - 형태를 이룬다. 이러한 동쪽담 밖의 자계변은 담의 살창 담의 출입문 계정마루의 창들로써 중간적 개폐가변도를 얻어 매체적 성격을 확보하고 있다. 그밖에 독락당 일곽의 내부와 외부에 있는 나무들은 계절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외부와 내부와의 상충을 막는 완충적 공간 - 형태 요소가 된다.

계정마당에 있는 측백을 비롯한 몇그루의 나무들은 계정, 사당, 어서각 사이의 완충적 공간 - 형태 요소이다. 한편 독락당마당의 큰 향나무는 안마당을 비롯한 상이한 생활장소에서 보이고 있어 집 전체에 대한 시각상의 매체적 공간 - 형태 요소가 되고 있다.

3) 재료의 역학적 구성

* 균형 : 대청에는 우물천장이 없으며 곳에 따라서는 벽이 없고 기둥만 서있는 부분도 있다. 문간, 마구간, 곳간, 방앗간, 정지에도 우물천장이 없고 벽이 판벽으로 된 부분도 있으며 바닥은 흙바닥으로 되어있다. 이렇게 지붕이라는 둔중한 물체와 기단이라는 굳건한 받침사이에서 확보한 공간에 비해 미소한 부피의 목재기둥, 보, 도리, 인방 등이 결구되면서 수치적 - 수평적 평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잘 드러난다.

* 시각 효과 : 독락당에 사옹된 원주는 다른 곳의 기둥보다 굵게 되어 있어서 다른 곳에서 보다 더욱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자계 건너편에서 계정을 보면 보통 건물의 기단보다 훨씬 강건하게 보이는 관어대에 2개의 기둥이 딛고 있음이 보이나 나머지 기둥2개는 관어대 위에 높게 쌓아올린 축대를 딛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본체 기동 밖으로 헌감을 받치고 선 4개의 기둥은 실제로 안정된 계정이 시각적으로 불안정하게 보이는 것을 방지하는 시각적 안정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4) 건축양식과 생활양식

* 양식적 분류 : 지금은 문간마당 바깥마당을 통해 안채와 독락당으로 나뉘어 들어가는 이른바 서울형 진입방식이며, 안채와 사랑채(독락당)이 별동으로 된 서울형 배치이나 안채가 'ㅁ'자형인 남부형 구성이며 정지(부엌)가 안방과 다른방(서녘방)사이의 동모서리에 위치한 남부형 간살이이다. 그러나 숨방채의 안사랑과 빈소방이 사랑방과 사랑대청으로 쓰였을 수 있다는 가정에 의하면 남부형 진입방식 배치가 되어 모든면에서 남부형이었다고 짐작된다. 나중에 지어진 독락당의 가구법이 초익공식이며 원주를 사용하고 단청이 한때 칠해졌었다는 사항들은 안채의 양식과 더불어 독락당의 양식이 영남지방의 전형적인 토반적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타낸다.

* 원형(1) : 회재가 태어난 양동리의 월성 손씨(月城 孫氏) 대종가는 행랑채 문간을 통해 사랑 - 행랑마당으로 들어가고 여기서 다시 안채의 문간과 사랑대청을 나뉘어 들어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어서 독락당 일곽에서 안채의 안사랑과 빈소방을 사랑방과 사랑대청으로 가정한다면 거의 같은 배치 간살이가 된다. 또한 그곳의 사랑대청 앞마당의 향나무는 건립당시(1457) 의 것으로 독락당마당의 향나무의 원형임을 짐작한다.

회재가 자란 본가인 무첨당(無朡堂)일곽에서 안채는 튼 'ㅁ'자형이되어 'ㅁ'자형인 이곳의 안채와 차이를 나타내나 간살이에서 정지가 큰방과 할머니방 사이의 동모서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곳 안채 - 소실이 사는 집의 안채의 원형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원형(2) : 회재가 설정한 독락당과 계정 그리고 사산오대를 비롯한 여러장소들의 원형으로서 노계 가사[독락당]에서 이곳과 비교된 중국 송대의 사마광(1018-1086)의 '독락원'을 추정할 수 있다. '獨樂園記'에서의 독서당이 독락당이 되며, 그곳에서의 '投竿取魚, 임采藥, 決渠灌花, 操斧剖竹 濯熱水, 臨高縱目, 逍遙상양;, 惟意所適'(낚시 드리워 고기잡고, 소매 걷어 약초 뜯노라. 도랑치고 꽃에 물주며, 도끼들고 대자른다. 세수하여 땀식히고 산에 올라 주위를 바라본다. 이리저리 바람쐬며 거닐으니 내 마음이 흡족하도다).의 전원생활은 회재의 은거생활과 거의 같은 것이된다.

5) 건축관 세계관

* 배경적 사상 : 회재가 다른 산들을 자색의 옥 긴 날개를 퍼덕이는 학 일산의 모습에 비유하면서도 주산을 형이상학적 개념인 도덕산이라 명명한 것은 그의 지향하는 바가 도학(유학)임을 말하고 있다. 본바탕의 참된 인성을 기른다는 양진암이나, 허물을 고친다는 비유로서의 세심대,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한다는 징심대, 論語 선진편에 나오는 것처럼 목욕하고 바람 쐬고는 노래부르고 돌아온다는 영귀대, 인자 산을, 지자는 수를 좋아한다는 인지헌(仁智軒)등의 명칭들은 그러한 지향의 구현임을 나타낸다.

한편 세속을 넘어선다는 비유로서의 탁영대, 장자가 혜자와 물고기를 보면서 논쟁한 고사와관련시킬수도 있는 관어대, 그리고 정혜사의 중들이 오고갔다는 암자로서의 양진암, 등의 명칭에서는 그가 정계에서 물러난 후에 도가, 불가의 사고와도 친밀해졌음이 드러낸다.

이러한 유가적 지향과 도가 불가적인 사고와의 친밀은 독락당이란 당호에서 종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孟子 양혜왕상(梁惠王上)편에서 독락(獨樂)은 여인락(與人樂)(남과 함께 즐김)보다 못하다고 공박당한 행위로서 알려져 있으나, 당시 양반사회에서 일반화되었을 글은 독락원기에서 사마광(司馬光)은(왕안석(王安石)의 신법을 반대하다 물러나}세상사람들이 버린 곳에 가서 얻은 전원생활의 즐거움이란 남들과 같이 나누고 싶지만 그들이 버림으로써 독락이 된다고 해명하고 있어 그 맥락을 알 수 있다.

* 장소화 : 독락당 일곽은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 지은 건축공간에 지나지 않으나 당호에 의해서 상징화됨으로써 전체의 상징체계(사상과 신념)로부터 의미를 부여받은 장소가 되었다.

반면에 사산오대(四山五臺)는 본래부터 그러한 자연이었으나 회재의 명명에 의해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장소로 상징화 되었다. 그리고 계정은 건축적 요소와 자연적 요소의 특별한 결합인 건축 - 자연으로서 헌감에 붙여진 인지헌(仁智軒)이란 명칭에서는 인자-산, 지자-수 라는 대응을 통해 양진암 계정마루와 화개산과 자계를 종합하는 장소로 상징화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3] 시에 나타난 건축관 세계관

* 독락당 : 시 [독락(獨樂)]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무리 떠난 당신 혼자 시를 읊을 때 산새와 냇고기가 얼굴을 쳐다보는도다. 모두들 찾고싶은 기묘한 곳에 밤이 되니 자규새 우지지며 달님이 산을 몰래 쳐다보는도다.)에서 독락당대청은 홀로 앉으면 창밖의 산새와 담의 살창밖의 냇고기가 바라다 보이고 밤이되면 달빛아래 새소리가 들리는 <奇絶한 장소>로 나타나 있다. 시[존양(存養)] 山雨蕭蕭夢自醒, 忽聞窓外夜鷄聲, 人間萬慮都消盡, 只有靈源一點明 (산속에 쓸쓸히 비내리니 잠이 절로 깨었는데 어느덧 창밖에는 새벽닭이 울어대는도다. 이제는 모든 근심 다 사라지고 영묘한 바탕(心)에 한가지가 밝아오는도다.)에서 독락당사랑방은 처마에서 떨어지는 쓸쓸한 밤빗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새벽이 되면 밝음과 아울러 들판의 새벽닭 울음소리를 전해 주는 창이 있으며 사욕을 떨치고 본바탕으로 돌아가도록 되어있는 <修養의 장소>로 나타나 있다.

* 계정 : 시[계정(溪亭)] 喜聞유鳥傍林啼, 新構茅첨壓小溪, 獨酌只요明月伴, 一間聊共白雲棲 (듣기좋은 산새소리 지저귀니 새로지은 조그만 정자옆엔 개울이 흐르도다. 혹자 술잔을 기울이니 밝은 달이 벗해주고 한칸옆에 흰구름이 머무는도다.)에서 계정은 자연[숲-새- 시내-달-흰구름]과 더불어 즐기는 곳으로서 나타나며, 시[관물(觀物)] 唐虞事業巍千古, 一點浮雲過太虛, 蕭灑小軒臨碧澗, 澄心境日玩游魚 (옛 성현의 업적이 천년에 빛나지만 한점 뜬구름처럼 허무하도다. 깊은 산골 수려한 정자에서 맑은 마음으로 종일토록 뛰노는 고기만 쳐다보는도다. )에서는 세속을 떠나 해맑은 곳으로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죽고마는 세상과 달리 영원한<자연과 만나는 장소>로 나타나 있다.

* 징심대 : 계정에 있는 편액에 써있는 [징심대즉경(澄心臺卽景)] 臺上客忘返, 巖邊月幾圓, 澗深魚戱鏡, 山暝鳥述烟, 物我渾同體, 行藏只樂天, 逍遙寄유與, 心境自悠然 (대위에서 객이 돌아갈 줄 잊었고, 바위는 기이하며 달은 얼마나 동그란가? 냇물이 깊어 고기가 즐거이 노닐며 산에 어둠이 드니 새가 연기를 쫓는도다. 세상과 내가 섞여 하나가 되니 행하고 느끼는 것이 단지 하늘을 즐길 뿐이도다. 이리저리 산책함에 정한바 없으니 심경이 저절로 느긋이 가라앉는도다.) 에서 징심대는 객(회재)가 딛고 서서 자연(징심대, 달)을 대하게 되면 마음의 평정이 회복되는 곳으로 <자연과 합일하는 장소>로 나타나 있다.

* 사산오대 : 시[조춘(早春)] 春入雲林景物新, 澗邊桃杏總精神, 芒鞋竹杖從今始, 臨水登山與更眞 (구름과 숲에 천지에 드니 풍경이 새롭구나. 시냇물 넘치고 복숭아와 살구꽃이 내 마음을 끄는도다. 짚신과 대지팡이로 이제 나서서니, 물건느고 산에 오르니 다시한번 참되도다.)에서 사산오대는 회재가 독락당을 출발하여 소요할 수 있는<이상적인 환경으로서의 장소 - 세계>로 나타나 있다.

4] 노계의 시가[독락당]에서 : 회재보다 70년 뒤에 태어나 독락당을 방문한 노계(老溪) 박인로(朴仁老)는 옥산의 산수를 보면서 주자(武夷山 - 도덕산)와 정자(後伊川 - 자계)가 있었다는 곳을 연상하며 독락당의 사면에 가득한 서책들에서 마치 제자대신 서책을 둔 공자와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그리고 이곳이야 말로 사마온공(司馬溫公)의 독락원보다 더욱 좋은 곳이라 본다. 또한 노계는 이곳을 회재가 학문을 닦아 염溪(周子)와 같은 현인이 되도록한 산실로서 바라보고자 했다.

그는 여러장소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랬음직한 회재의 생활과 심경을 체험하고자 했다. 그래서 영귀대에 올라가 맑게 솟아오는 시흥을 얻기도 하고 연당에서는 연잎에 방울진 빗물에 매혹당해 보았으며, 징심대에서는 가슴이 새로워지면서도 고독해져서 산그림자와 새소리와 만나게 되었으며, 탁영대에서는 세상사를 잊어 버리고 땀을 식힐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감격한 나머지 독락당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게 된다.

'天高 地厚도 有時盡 하려니와

獨樂堂 淸風은 가업실까 하노라'

여기서 노계는 독락당(건축)의 형체는 세상의 변모에 따라 사라지겠지만 회재(인간)가 부여한 독락당(건축)의 풍격만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는 건축 - 세계에 관한 생각을 말하고 있다.

5. 맺음말

지금까지 그 사랑채(독락당)가 보물413호로 지정되었으나 자세히 조사되지 않은 독락당 일곽을 그 주변환경과 함께 조사 분석해 보았다.

독락당 일곽을 처음 찾았을 때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었는데 처음에는 그 황량한 모습에 실망하였으나 그곳을 배회함에 따라 자연과 어우러진 건축물의 풍격에 매료당하여 연구한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후 독락당 18세 종손을 만남으로써(문구 일부 수정) 이곳의 중요성을 좀더 자세히 알게되었다.

충분치 못하거나 잘못된 보수공사, 휴일이면 불법 유원지화하는 주변환경, 무관심에 의해서 잊혀지고 변형되어가는 연계장소는 가능한 빨리 제대로 되어져야 할 것이다.

독락당 일곽과 사산오대에서는 서구의 근대건축에서 간과되었던 여러 지각과 사고 내용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집내부를 비롯한 주위의 여러 곳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여 상징화하고 이들의 전체적 구성을 통해 주거인의 지각과 사고에서의 지향성을 표현한 후 다시 그 지향하는 전체적 상징체계로부터 하나하나의 상징화된 장소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방법론은 현대건축에서 응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The Summary for Portfolio in Engli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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