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30구간: 죽령-소백산-고치령
(남편은 산의 전도사: 초보등산인의 입문기)
1999년 5월 21일-22일
조성미(20회 김웅배 부인)
난 지금 신앙 고백과도 같은 등산 입문기를 쓰고 있다. 내가 백두대간의 작은 몇자락이라도 접한 그 처음은 99년도 초여름의 소백산구간 이었다.
사실 나의 등산 실력이라야 아주 미천한 것이어서 남편을 따라 청계산, 북한산 등을 가는 정도였다. 워낙 산을 좋아하는 남편은 마음으로는 내가 함께 가주길 바라면서도 결코 같이 가기를 강요하는 적이 없었다. 그날도 선뜻 권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남편은 소백산 코스가 비교적 완만하다는 말만 했었을 뿐이었는데, 산행 다음날에 있을 동강 래프팅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내 스스로 따라 나선 것이었다. 그 날의 느낌은 참 좋았다. 따뜻하시고 멋지신 선배님, 동료, 후배님들과 기획부터 실천, 협동, 분담 등 등을 지켜보면서 산사나이들의 집단에 크게 고무된 것이다.
난 아직도 산길에 어둡다. 얼마가 남았는지도 몇 시간을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내가 산과 같이 호흡하고 있고, 이 순수하고 진실할 것 같은 사람들과 같이 뭔가 하고 있다는 뿌듯한 느낌으로 걷는다. 그리고 가끔은 눈을 들어 뒤를 본다. 잠깐 사이인 것 같은데 내가 지나 온 길은 벌써 몇개의 봉우리를 뒤로 하고 있다. 난 그저 말없이 잠시 걸은 것 뿐인데....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저 그날 그날을 묵묵히 살았을 뿐인데 내가 살아온 흔적은 여기 저기에 남아 있다. 크게 튀지도 않은 채 자그마한 봉우리며 능선이 조용히 그렇게 있는 것처럼.
난 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참 좋다. 그냥 참 좋은데 왜 좋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 글로 옮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짧은 필설로 옮기다 보면 그 보다 덜해질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이다.
난 지금 제주에 산다. 내 뜻과 무관하게 그리 되었고 또 내 뜻과 상관없이 서울로 가겠지만 짧은 제주생활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를 보기 위해 와 주시는 많은 분들이 고맙다.
집에서 10분이면 바다에 닿을 수 있고, 눈을 들어 쳐다보면 그곳에 민족의 영산이라는 한라산이 있다. 매일 보는 바다의 얼굴도 늘 다르고 10회 이상 올라본 한라산의 모습도 다 달랐다. 늘 다른 얼굴의 한라산이 있어 참 좋다. 백록담에 오르기 위해 먼길 마다 않고 와 주셨던 30여분의 20회 동기들, 10여분의 대선배님들께 감사 드린다. 좀더 잘 모시지 못했던 점에 송구함도 느끼고.
그후 생겨난 새로운 꿈이 있다면 어느 산자락에 살면서 산이 좋아 찾아오는 많은 이들의 동무가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 보니 이건 늘 말하던 남편의 꿈과 같아져 버린 것이다. 노후엔 설악산에서 살겠다는, 이쯤 되면 남편은 완벽한 산의 전도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백두대간을 가면서 "하늘의 별이 손에 잡힐 듯 하다는 것"이 글 잘 쓰는 이들의 말장난이 아니었음을 실감했었다. 전공이 이과여서인지 문학이라든지, 글쓰기의 재주가 전혀 없는 내게 그건 그저 그렇게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이겠거니 했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그 무수하고 커다란 별들은 그저 내가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때의 감동적인 장면은 평생을 두고도 잊혀질 것 같지 않다. 손에 잡힐 듯 펼쳐진 무수한 별들, 샹들리에처럼 영롱한 주먹만한 구슬들이 온갖 나무마다 매어 달려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소리..... 바람 부는 대로 생겨난 나무 위의 눈꽃이며 얼음조각들, 끝간데 없이 펼쳐진 운무 속의 하얀 눈밭, 이 모두가 산이 거기에 그렇게 있기에 내게 보여준 많은 장면들이다.
새벽의 어둠속에 버스가 토해낸 많은 사람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그저 뭔가를 향해 묵묵히 걷기 시작하는 장면도 내겐 대단한 감동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산에 빠져 산을 예찬하고 있음이니..... 건강에 대한 관심도 산을 좀더 오래 오를 수 있는 바램이니. 난 감히 전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