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제17구간: 추풍령-작점고개-큰재

1998년 8월 22일-23일

이정용(20회)

1998년 8월 22일 토요일 오후 10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23일 일요일 백두대간 종주 구간 중 제17구간인 추풍령-작점고개-큰재를 산행하였다. 이 구간을 산행하면서 나는 인생관이 바뀌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였으며, 이것이 수상문을 쓰게된 이유이다.

추풍령 하면 구름도 쉬어 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고개라 하여 대단히 높고 험준할 것으로 생각되나, 사실은 해발 200m의 밋밋한 분수령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이고,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선 철로와 고속도로가 국토의 중추인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고갯길이다.

김하돈씨가 쓴 {(마음도 쉬어 가는) 고개를 찾아서} 라는 기행문을 참고하여 보면, 추풍령은 조선시대에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하여 빠짐없이 쉬어 가는 곳이었고, 목탄차 역시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쉬었다 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우마차의 농경시대에서 자동차의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추풍령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생겨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관문으로 매우 중요해졌으며, 그 분수령은 백두대간 위에 놓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가 넘어가던 백두대간의 문경새재가 우리나라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경부선 철길과 고속도로가 넘어가는 백두대간의 추풍령이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추풍령에는 모든 것이 모여들고, 다시 흩어진다. 구름이 모여들어 쉬고, 바람이 모여들어 잠자며, 사람이 모여들어 잠시 멈추어 선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지금까지 걸어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길을 떠난다. 구름도 변하고, 바람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여 새로운 길을 간다.

나도 추풍령구간을 산행으로 걸어서 넘어 가면서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즉 아무런 장애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 온 바와 같이, 1998년 5월 16일과 17일에 추풍령의 앞 구간인 궤방령-눌의산-추풍령 구간을 산행하였고, 또한 눈 때문에 위험하다고 하여 남겨 두었던 덕유산 종주 산행도 1998년 6월 5일과 6일 그리고 7일에 걸쳐 원만히 끝냈다. 그리고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추풍령에 멈추어 서서, 여름방학 동안 충분히 휴식하였다. 특히 2학기부터는 1년간 안식년을 허락 받았기에 강의에서 해방되어 연구, 집필, 독서, 등산, 여행 등 모든 것을 자유롭고 여유있게 진행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풍령을 넘어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하고 자 하는 날, 즉 1998년 8월 22일 토요일,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다가 왔다. 소위 말하는 삼재가 시작되었고, 첫해에 들어오는 삼재가 혹독하게 다가 왔다. 배신, 배반, 반역, 분노 그리고 무기력. 이러 하지도 저러 하지도 못하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애처로웠다. 백두대간 산행을 위하여 여의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선길 (20회)동기 동창과 오후 9시에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이행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오후 7시에 미안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하니 안타까워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전화를 끊고 넋빠진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서 허공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다 힘없이 일어나 주섬주섬 배낭을 챙겼다. 이렇게 앉아 있다고 일이 해결될 것도 아니고, 속만 상하니 산에나 가자. 그래 죽이던지, 죽던지, 살리던지, 살던지, 될 대로 되어라. 백두대간에 가자. 다시 이선길 동기동창에게 전화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추풍령 산행 길에 나서게 되었다.

처음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시작 할 때, 솔직히 나는 백두대간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이선길 동기동창이 1997년 9월 5일에 지리산 등산을 가자기에 한번도 안가 본 곳이기에 따라 나섰다. 산행하는 일행이 모두 서울고 동문들이지만 동기동창 외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어 매우 낮설었다. 또한 큰산을 산행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산행요령이 없어 중산리를 출발하여 법계사를 지나 천왕봉에 오를 때, 앞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붸아가고 뒷사람에게 뒤지지 않기 위하여 정신없이 힘으로 올라갔으며, 그후 벽소령 산장까지 가는 구간도 뒤쳐지지 않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그리고 장비도 형편 없었다. 속옷으로 메리야스를 입고 있어 땀으로 철벅 젖어 있었으며, 랜턴도 없어 밤중에 벽소령 화장실에서 말 못할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9월 7일이었다. 연하천 산장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또다시 산행이 시작되었다. 토끼봉을 올라가는 데, 앞에 김종교(16회)선배님이 뚱뚱한 몸으로 가쁜 숨을 쉬며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나는 앞질러 보고 싶은 자만심이 은근히 솟아올랐다. 그래서 보란 듯이 힘을 내서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나갔다. 무척이나 많이 앞질러 갔다. 그런데 정상에 올라 조금 쉬고 있는 동안에 김종교선배님이 언제 따라 왔는지 바로 따라 와서는 쉬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더욱 힘을 내어 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삼도봉을 올라갔다. 그런데 너무 과속을 하는 바람에 그만 현기증을 일으키고 정상에서 한참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앞서 나갔다. 이를 악물고 일어나 따라 나섰고, 노루목 고개마루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올라갈 것인가, 그냥 우회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이왕 지리산에 온 김에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고, 선배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무척이나 지쳐있는 나를 보고 이상현(11회)선배님이 천천히 올라오라고 이른다. 이때 선배님이 쓴 킬리만자로 기행문을 읽은 것이 생각났다. "초원과 사막으로 된 등산길을 걸으면서 터득한 뽈레 뽈레(아프리카 말로 '천천히 천천히')는 수도자의 인고의 걸음을 보다 더 조심스럽게, 보다 더 겸허하게 만들었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바로 이것이다. 수도승이 염불소리에 맞춰 탑돌이하듯이, 순례자가 끝없이 이어진 성지를 순례하듯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걷는 것이다. 순례자의 걸음을 나의 산행걸음에 접목시켜 보았다. 반야봉을 무난히 오를 수 있었다.

반야봉 정상에 오르니 장헌수(14회)선배님이 한 사람, 한 사람 기념 촬영을 해 주고 있었다. 나도 반야봉 표지석을 끌어 안고, 천왕봉을 뒷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었다. 멀리 천왕봉으로부터 걸어온 백두대간 능선길이 뚜렷이 보이고, 그늘 속에 반야봉이라는 한문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내가 매우 마음에 들어 좋아하니, 장헌수선배님이 확대하여 액자에 넣어 선물해 주어 지금도 학교 연구실에 걸어 놓고 항상 바라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연구실에서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봉우리 이름을 반야심경에서 따온 것 같은데, 그러면 모든 것이 (빌)空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 아닌가. 그 동안 걸어온 인생살이의 모든 희노애락이 모두 공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동안의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다.

나는 반야봉 등산 이후 지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전에는 그저 산봉우리이고, 계곡이고, 고개라 생각하고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랴 하고 지명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무관심해 왔었다. 오히려 무슨 봉우리, 무슨 계곡하며, 지명을 외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고 경멸까지 했었다. 그저 봉우리로 보고, 계곡으로 보면 되는 것이지, 명칭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사고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반야봉에서 내 생각이 짧았음을 알았다. 지명과 지형을 잘 연관지어 보니 의미있는 교훈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지명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의 횟수를 점차 늘려 나가자 낯설음이 가시고 익숙해져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안에서 술도 주고 받으며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데, 아마 1997년 11월 하순경 단풍도 다 떨어져 가는 봉화산 구간을 산행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의 일일 것이다. 당시 총산우회 회장님이신 이익효(11회)선배님께서 젊은 후배들과 술을 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 한 후배가 건의사항이 있다고 하면서 백두대간 산행을 지금처럼 단순하게 산행만 하지 말고, 어떤 주제를 내걸고 다같이 의미있게 행사를 치루자고 주장하였다. 나도 귀가 쫑긋 해지고 좋은 제안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이익효 회장님의 응답은 의외였다. 즉 우리 서울고 동문산우회의 백두대간 산행은 여러 동문들을 태우고 긴 여행을 하는 기차와 같고, 기차를 타고 있는 여러 동문들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던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멋있고 의미있는 말씀이었다. 시인 천상병씨는 인생이란 각자 하늘에서 내려와 나름대로 소풍놀이 하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때 나는 백두대간 산행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고, 그리고 내 나름대로 커다란 주제를 내 걸었다. 즉 먼저 조국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가슴에 안고, 백두산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자, 다음 국토와 자연을 사랑하자, 그리고 동창들과 우정을 다지자, 끝으로 나의 건강을 지키자, 이를 위해 백두대간을 꼭 완주하자는 등. 이와 같은 주제들은 그후 잘 지켜졌다. 백두대간 산행을 위하여 준비할 때마다 이 주제들을 마음속에 새겨보고, 산행 중에도 가끔 이 주제들에 대하여 생각 해 보곤 했다. 특히 가파른 산을 오르다 힘이 들 때는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크게 내 세웠고, 정상에서 풍경을 바라 보면서는 국토사랑을 크게 내세웠다. 이들에 대한 관심이 원체 컸기 때문에 어떠한 볼일도 백두대간 산행을 방해할 수가 없었고, 산행도 매우 즐거워 졌다.

그런데 이들 주제가 1998년 8월 23일 추풍령에서 작점고개를 넘어 큰재까지 산행하는 동안에 모두 사라져 날아가 버렸다. 즉 8월 22일 토요일 나에게 다가온 어마어마한 불행한 사건을 일단 덮어놓고 가까스로 산행에 나서 추풍령으로 가는 버스를 탓지만, 나의 머리 속은 온통 사건에 따른 흑막으로 꽉 차있어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8월 23일 산행 중에도 머리 속은 온통 사건으로 꽉 차있어 그 동안 잘 지켜온 산행주제가 생각나질 않으며, 배반에 따른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여, 숨이 차서 더 이상 걸어 갈 수가 없었다. 혼자 길가에 앉아서 머리를 다리사이에 틀어박고, 한참동안 분을 삭여 진정시키고 나서야 겨우 일어나 힘겨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내 나이 50이 너머 지천명인데, 이게 천명이고, 내 팔자란 말인가. 천명에 거역하는 반항심이 부글부글 들끓어 올라 왔다. 발광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답답했고,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모두들 이렇게 밋밋한 산에서 웬 일로 헐떡거리냐고 한마디씩 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산행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정말 힘 들었다. 이토록 힘든 산행을 하던 중에 불현듯 마음을 고쳐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중얼 중얼거렸다. 분노를 삭이자. 천명에 순응하자. 내 팔자로 여기자.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자.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새 출발을 하자.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자. 무념무상에 빠지자. 나의 호가 무소, 즉 없을무 바소, 즉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아니냐. 무엇을 욕심내냐. 모두 다 주어 버리자. 나의 인생만 남기자. 등등. 그저 중얼거렸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큰재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쳤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스스로 내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이와 같이 1998년부터 들어오는 삼재의 해가 시작되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의 주제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즉 이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하여 산에 올라 가는 것이 되었다. 그저 어떤 생각도 없어지도록 산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마냥 올라갔다.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가쁘게 쉬면서 산을 오르고 또 올라갔다. 무척이나 많이 다녔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무념무상에 빠지기 위하여 산에 가는 것이다. 술도 무척 마셨다. 취해서 나만의 세상에서 살고자 했고, 지금도 기억할 수 없는 환상적인 우주여행을 한 적이 많았다. 하기야 인생도 무엇이 되겠다고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다가, 우리 나이가 되면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1999년에는 묵는 삼재의 해가 되어 한해동안 숨죽이고 납작 업드려 보내느라 정말로 혼났다. 너무 숨죽이고 살다보니 체력이 무척이나 약화되었다. 그런데 백두대간 산행 구간은 문경새재에 접어들어 소백산을 종주하면서 무척이나 길어지고 오르내림이 심해졌다. 따라서 이번에는 힘이 달려 산에 오르는데 문제였다. 그래서 산에서 기를 받아서 산기운으로 올라가는 비법을 사용했다. 즉 배로 숨을 쉬면서, 보폭을 좁게 하고, 리듬 있게 뽕짝노래를 속으로 부르며 산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냉기가 느껴지는 곳에서는 잠시 멈추어 서서, 모든 땀구멍을 열어놓고, 입을 벌려 깊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다. 특히 정력을 키우기 위하여 되도록 자주 소변을 보는 척하면서 거시기를 꺼내서 바람을 쏘이고, 금붕어가 물을 먹듯이 산의 정기를 먹인다. 이 비법으로 무척이나 긴 구간도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 갈 수 있었다.

새천년 2000년에는 나가는 삼재의 해가 되면서 내 생활은 한시름 벗어나고,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하였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도 무척이나 많이 진행되어 대관령을 넘어서는 구간까지 왔으며, 전구간 완주가 손안에 잡혀왔다. 3월 26일 일요일에는 당일치기로 삽당령에서 닭목재까지 가볍게 산행하면서 개근상을 생각해 보니, 가슴이 뿌듯하고, 지난 2년 반 동안의 산행기록이 아련히 떠올랐다. 학교 연구실과 집 공부방의 벽에 전국지도를 붙여 놓고, 산행한 곳을 빨간 펜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쭉 뻗어 올라온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참으로 많이 걸어 왔다.

그런데 4월 9일 일요일 새벽 대관령에서 산불감시원들에게 입산을 저지 당하면서 더 이상 백두대간 산행을 진행시킬 수가 없게 되었으며, 또한 언제 해제될지 기약 할 수도 없었다. 그후 산행예정이 통보되었다가 취소되는 사례가 몇 차례 있었고, 그때마다 생활리듬이 엉망이 되었다. 걱정이 되었다. 계획해 놓았던 앞으로의 모든 일정이 불확실하게 되었고, 어떠한 학교 일로 백두대간 산행이 방해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문제는 그 동안 한번도 안 빠지고 개근해 왔으며, 또한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구간을 꼭 개근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앞으로 결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대단히 구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기를 갈망하듯이, 나도 자유롭기를 무척이나 갈구 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매우 자유롭게 살아 왔으며, 너무 자유롭게 행동했는지 '삐딱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어보았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하는 아담 스미스는 1759년 그의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인간의 여섯 가지 동기 가운데 하나를 자유라고 보았다. 자유는 정말로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찌하다 백두대간 완전 종주라는 개근상에 이렇게 구속되어 있단 말인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산불 때문에 입산금지 된 후, 2개월이 지나 비오는 계절이 되어서야 백두대간 산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반갑다는 생각보다는 나의 자유가 너무 구속되어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따라서 백두대간 완주 개근상을 파괴시켜 해방되고, 자유롭게 생활해 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 27일 토요일 산행준비를 하는데 종전과는 달리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무성의하게 배낭을 챙기자 아내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꾸 말을 붙여왔다. 그저 투명스럽게 대답하고 집을 나섰고, 대관령-진고개 구간을 산행하였는데, 그렇게 재미가 없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노인봉 산장 밑에서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하게 병내리로 하산하였고, 버스 안에서 L 동기동창과 언쟁을 하기도 하였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잠재의식 속에 너무나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어서 6월 11일 토요일에 산행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나는 산행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아내가 같이 가자고 조르는 것이다. 산행길이 험하고 길어서 불가능하다고 하자, 버스 안에서 쉬어도 좋으니 걱정 말고, 맑은 공기나 흠뻑 마시러 가자고 하면서 서두르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배낭을 챙겨서 아내와 같이 백두대간 산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아내가 몇 차례 동행해 주었는데, 아내와 같이 가면 여러 사람 앞에서 언행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커다란 구속을 받았지만, 오히려 버스에서 옆에 아내가 앉아 있으니 편안했고, 잠도 잘 왔고, 교통체증도 짜증나지 않았다. 산행할 때도 목적지에서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백두대간 완전 종주라는 구속도 부드럽게 다가왔다. 사람은 완전히 자유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구속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2000년 10월 1일 3년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끝냈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기록이다. 산행이 끝났어도 백두대간 모든 구간 구간이 수없이 생각난다. 시도 때도 없이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그 중에서 추풍령이 가장 궁금하다. 오늘도 추풍령에는 모든 것이 모여들고, 잠시 멈추어 섰다가, 다시 흩어져 떠나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의 산행은 산에 포근히 안기어 산의 향기를 맞고, 산의 공기를 들이쉬고, 산의 물을 마시는 등, 산과 어울려 지내고자 산에 들어가고 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