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13구간: 화주봉-우두령

1998년 4월 5일 (일) 6:40 출발

곽경호(26회)

오늘 출발하는 백두대간팀은 총 인원이 50여 명으로 추측된다. 14회 이상만 타는 차에 당번 병으로 김관석이와 동승하였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적적하여 가지고 간 동방견문록을 보다가 여러 선배들에게서 사랑의 꾸중을 듣다. 몇 페이지 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지난 13구간 산행 후 Bus 타고 오면서 독서의 충동을 강하게 느껴 이번 14구간 산행에 책을 갖고 왔는데 또 튀어 보였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로선 8회 째 백두대간 출정이다. 지난 13구간(나7회)에선 일기도 못쓰다. 왜 그랬을까? 김웅배선배가 바람잡고 취하더니 날 잠 못 자게 깨워 술 먹이고 자기는 잤다. 나 또한 취해서 깩깩거리며 노래부른 일들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그의 선배 존경과 후배 사랑은 남 다르다. 그 큰 키가 일어서면 버스가 낮아 보이고 휘청한 모습에 작은 소주 잔이 어울리질 않는다. 그 호걸은 맑고 순하다. 치기어린 것을 패기가 카바한다. 가정에선 형수까지 딸 셋을 거느린단다. 현실과 이상을 조화하며 사는 사람일 것이다. 왕왕거리는 목소리와 후후 웃는 너털 웃음. 산에서의 겸손한 자세 그리고 모자 속에 감춰진 빈 머리카락. 영국에서 사 왔다는 체크 무늬 캡. 늘 인화의 중심에 있는 일꾼. 밉지 않은 그의 행적은 백두대간팀의 또 하나의 인물로서 자리잡게 하고 그를 만나서 행복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다고 본다.

빠르게 2주가 지나고 요번도 못쓰면 이 역사가 망각 속으로 빨리는 것이 이상하리 만치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아침을 옥산(하)휴게소에서 먹는데 4000원 짜리 국밥으로 매우 맛이 없다. 엊저녁 피곤해서 우리 식구들이 9시까지 자고 저녁식사를 대충해서 배가 고픈데 맛없지만 오늘 산행을 위해 밥 한 공기는 모두 비우다. 식후 승차하여 또 자다.

오전 10시 50분경 물한계곡에서 출발하여 산을 오르는데 산길 오른편 민주지산은 3일전 공수부대 하사관 7명이 탈진으로 사망한 곳이다. 그 날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지고 비가 와서 그랬다고 본다. 오늘의 날씨도 매우 좋지 않다. 추적추적 차가운 봄비가 내리는데 체온을 매우 뺏어간다. 오르면 오를수록 비는 구름 속의 비가 되어 온도가 더 내려간다. 물한계곡에서 1시간15분 올라가서 헬기 장에 도착했는데 온몸이 빗물이라 옷을 갈아입고도 추워서 대원들은 힘든데도 쉬지 않고 바로 행군하여 간다.

시계는 제로로 보이는 게 거의 없다. 희부연 안개구름 속의 행군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불안하고 위험하기에 짜릿한 그 맛을 모른다. 드릴과 서스펜스. 지금 구름 속을 통과한다. 아래는 Goretex 바지 하나라 더욱 춥다. 학교에서 苦盡甘來란 단어를 배울 때 느낌이 와 닿지 않더니만 지금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여진다. 바로 그런 고통의 상태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도 지금을 대원들은 오래 기억할 것이다. 공수부대원들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정도이니까. 위험한 상태라 말들이 없이 심각하다. 앞으로의 삶도 그러하리. 내가 어느 부분에서 괴로운 것을 오랫동안 다 하면 달콤한 순간이 오리라 믿어진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그럴 때 이상하게도 집에 두고 온 딸 생각이 간절하다. 아빠가 나가는 걸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나의 보물. 사람이 고통스럽고 험하여 절대적 상황이 되면 절실한 것이 생각나나 보다. 빨리 귀경해서 오손도손 마주하고 싶다.

희부연 구름 안개비 속을 거친 호흡과 더불어 행군한다. 점점 피로감이 들기 시작한다. 방수 코팅이 불완전했던가 신발 속에 물이 찔쩍거린다. Patch를 했어야 했는데... 4시간 지나서 화주봉에 도착했는데 경사를 올라갔는지 모를 정도로 주변이 밋밋해서 잠깐 스쳐 지나다. 추워서 빨리 버스로 돌아가 옷 갈아입고 싶어 발길을 재촉한다. 화주봉을 오르기 전 어디선가에서 도시락을 열고 식사를 하다가 김성화가 보온병에 싸온 연한 된장국을 권해 먹는데 기가 막히다.

화주봉 정상에선 김승남선배와 형수가 먼저 와서 양주 한 잔씩 정상주를 권한다. 늘 그렇듯이... 매번 모든 대원들은 그 분이 권하는 정상 양주를 신세진다. 과일도 철마다 꼭 깍아서 잘라서 여러 사람 먹을 수 있도록 여러 그릇에 나누어 주는데 그 정성이 엄청나다. 그 것 뿐인가. 오며가며 버스에서 술과 함께 푸짐한 안주거리까지 준비하는데 그 시간만도 꽤 걸릴 것이다. 그 공덕은 우리 팀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대의 대단한 밑거름이자 교훈이다. 사랑과 정성으로 베푸는 헌신과 봉사 그 자체이다. 현철수선배가 매실주를 집에서 담근 것이라며 또 주어 거푸 마시고 목을 약간 덥힌다. 우두령으로의 하산 길은 생각보다 빨랐다. 1시간 남짓이었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게 철탑 지나자 버스가 반갑게 보이다.

버스는 11시 30분 넘어 서울에 도착했으니 많이 막힌 셈이다. 드물게 14회 이상 16명과 26회 우리 둘이 그리고 형수님 한 분 모두 19명이 탄 버스에서 술판이 벌어져 장헌수선배의 양주를 모두 비우고도 모자라 맥주 6 can 소주 4병을 가게에서 샀는데 그게 충분히 모자랐다. 이익효선배가 설설 술이 오르고 그 동기 3성 퇴역장군이 불려오고 2성 퇴역장군 또 그 밑에 육사 후배 정 영 선배가 불려가 술잔이 오고가고, 우리가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되어 가다.

김세윤도 뒤에서 듣기만 하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러는 중 내가 이상하게 끌려 들어가서 실수를 하다. 전 치과의사협회장인 Y선생을 약간 비난한 것이다. 그걸 새로 오신 어느 모르는 선배가 지적하다. 그 이후로 나는 자다. 선배들은 술을 매우 많이 드신다. 내가 겪은 바로는 주량이 후배들보다 1.5배는 족히 되는 것 같다. 신명나고 걸찬 걸죽한 대화가 넘치고 다감한 분위기가 시간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집에 오니 처자가 기다리고 12시 반 넘어 1시 되어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