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1, 2 구간: 지리산 천왕봉-노고단

(하룻강아지)

1997년 9월 5일-6일

이선길(20회)

93년 7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해 10월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겪지 못했던 일들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고 내 마음대로 결정이 안 되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북한산에 올랐다. 힘이 드는 시간, 걱정거리가 잊혀지고 물과 나무가 위로해주며 정상에 오르면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내려와선 느껴보지 못했던 막걸리 맛에 나는 바로 산에 재미를 붙였다.

그래서 나는 94년 70번 산에 올랐다. 혼자 가고, W군하고 가고... 북한산 42번, 관악산 12번, 도봉산 6번, 명지산 2번 등등... 구기동 파출소에서 대남문까지 세 번 쉬다가 두 번, 한 번, 나중에는 쉬지 않고, 이제는 시간 단축이다. 1시간 11분이 내 기록이다.

月刊 {山}을 보면서, S군을 따라다니면서, 새로운 코스를 다니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릿찌를 타게 되고, 향로봉, 염초봉, 만경대를 경험하면서 짜릿한 재미를 느꼈다. 새로운 코스를 내려오면 그 동네 싸고 맛있는 집을 찾게 되었고, 기억해 두었다.

95년 9월 16일 토요일 나는 친구 셋과 함께 북한산 12성문을 완주했다. 그 후 새로운 코스를 알고 맛있는 집을 알고 릿찌를 알고 나는 자신이 생겼다. 친구들과 만나면 나는 산 얘기만 했고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산에 오른지 만 2년만 이다. 그전에는 산에 가자면, "미쳤냐? 돈 생기냐? 그 시간에 술 마신다"하던 나였다. 그러던 내가 북한산 좀 갔다해서 건방을 떠니 친구들 눈에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95년 1월 12일 목요일 혼자 대서문에서 의상능선을 지나 대남문에 이르렀을 때 가느다란 눈이 내렸다. 때마침 W군의 술 전화가 왔다. 상계동까지 가야 하므로 대성문을 택했다. 술이 급하고 길이 좋으니 내걸음은 경보 수준이었다. 해는 기울었지만 나는 여러 번 다니던 길이기 때문에 랄랄라 내려갔다. 일선사 바로 전에 고속도로 같이 넓은 길에, 얼음 위에 가랑눈이 덮일 듯 말 듯 눈에 들어오는 순간, 경사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조심할까 말까 하는 순간 나의 왼쪽 발은 이미 그 위를 밟고 있었다. 미끌, 아차하며 오른 발에 힘을 주어 앞의 나무를 잡으려 점프를 했다. 그러나 오른 발은 마찰력을 잃고 찌익 미끄러지는 것이다. '죽는구나!' 하면서 5m를 떨어졌다. (나중에 확인 사항) 의식을 잃었는지 나는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앉아있는 상태였다. 심한 갈증을 느꼈다.

다른 이야기. 나는 어렸을 때 노량진 본동에 살았다. 9평 균등 분할 주거지역이었는데 그곳이 새 동네였다. 왜냐하면 한강변 어로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을 홍수의 위험 때문에 집단 이주시키면서 새로이 만든 주거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집 뒤에는 꽤 깊은 하천이 흐르는데 비만 오면 변 냄새, 쓰레기 냄새가 심했다. 그 당시 청소 방법은 유일하게 장마 때인 것이다. 아버지는 내 집 뒤가 막히면 안되기 때문에 (그전에 아버지와 엄마가 늘상 하던 일) 다 큰 장남인 나에게 그 어마어마한 일을 맡기신다. 장화신고 용감히 내려선 나는 아버지 시키는 대로 쓰레기를 아래로 내려보낸다. 내 짧은 생각에 큰 돌이 쓰레기를 엉키게 하는구나 생각 들면서 아버지 허락 없이 그 돌을 들었다. 웬걸 엄청나게 무거우며 미끌거린다. 그러면서 나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은 큰 돌과 큰 돌 사이에 짖이겨졌다. 의식을 잃었는지 아닌지 몰라도 나는 마루에 누워있었고 엄마한테 물을 달라고 했다.

배낭에 있는 물을 꺼내려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큰일 났구나, 어떻게 해야지." 날은 깜깜하고 대책을 생각하고 있는데 잠시 후에 "괜찮아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들은 내려왔다. 그들은 나를 구출한 것이다. 양 어깨에 의지하며 내려오는데 평창 매표소가 왜 그리 멀던지....배낭이 등을 쳤는지 등뼈가 제일 아프다. 매표소에서 큰길까지 왜 그리 계단은 많은 건지... 큰길에 오자 그들은 병원에 가라고 하며 나를 보내려한다. 나는 소주를 대접하겠노라 우기며 갈비집에 들어갔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운전면허를 따놓고 수많은 음주사고를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타박상에 자신이 생겼고 갈비뼈는 부러져도 저절로 붙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5인은 자신들을 정릉 토박이라고 소개하면서, 운동화 신고 정릉에서 한잔하다 산에 올랐다고 말하면서 즐겁게 소주를 마신다. 나는 아직 온몸이 쑤시며 부러진 데는 없는 것 같으나 등뼈가 아프다. 그래서 나는 술이 내키지 않아 대충 끝내고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씻지도 않고 자버렸는데 다음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

95년 3월 21일 화요일 월간 {산}에 소개된 백화사 가사당 암문을 답사키로 하고 나섰다. 백화사를 끼고 왼쪽으로 가야하는데 오른쪽을 올랐다. 능선을 중간쯤 올랐을까 갑자기 소총소리가 들린다. 나는 군부대 사격장 능선을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유탄에 맞을까 두려움에 사력을 다해 뛰었다. 한 능선을 다 오르니 통행금지(군사지역) 낡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럭저럭 시간 많고 큰일은 해결 안되고, 열심히 산을 올랐다. 96년에는 입산회 회장을 맡으며 더욱 열과 성을 다했다.

96년 3월 2일 토요일 나는 W군과 J군과 함께 논남기로 갔다. 논남이 종점 민박은 나의 가장 편안한 쉼터이다. 노부부가 나를 항상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 집 노인은 6·25때 논남기 학살을 이야기 하곤 했다. 북에서 내려올 때 반드시 지나가는 길이 강씨봉 귀목고개라 한다. 그 노인은 나하고 여러 번 술자리를 같이 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됐다. 그 집 안주인은 내가 하루 묵고 가면 수정된 달걀을 스무개씩 건네 주곤 했다. 닭백숙을 죽과 함께 배부르게 먹고 자고 나니 아침에 온 세상이 하얗게 눈이 내렸다. 논남기, 명지산, 2봉, 3봉, 귀목고개 논남기가 계획된 코스인데 그 당시 논남기 명지산 직코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전에 월간 {산} 개척코스 소개로 명지산에서 논남기로 내려온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만장일치로 산에 올랐지만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능선, 능선만 되뇌이며 한참 헤매는데 저만치 사람이 보인다. 60대 중반 머리가 허연 노신사였다. 노신사도 명지산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하기로 하고 오르는데 산이 높아질수록 눈이 깊어지며 경사는 더욱 가파르고 포기해야할 지경이다. 그러나 W군은 자신있어 보인다. 그의 동물적 감각은 내 일찍 경험했던 바 우리는 그냥 그를 따르기로 했다. 한참 후에 우리는 명지산에 올랐다. 길을 따라 온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은 만들어 오른 것이다. 다시 논남기에 도착하니 8시간 30분 후였다. 그 노신사는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로 자기 차를 타고 가버렸는데 나는 아직도 그 노신사와 우리의 산행에 대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97년 9월 5일 하룻강아지는 백두대간이 무엇인지 모른 채 중산리로 떠났다. 큰 배낭에 속옷, 양말, 남방, 바지, 방한복 챙기고 버너, 랜턴, 깡통, 술 거기다가 C-Ration까지... 지금 나는 북한산에 갈 때 7-8kg의 배낭을 지는 것을 감안할 때 15kg 이상은 됐을 것이다. 나는 큰 배낭을 두 번째 갖고 갔는데 첫 번째는 94년 12월 17-18일 사명산 갈 때였다. 5명이 가면서 나는 나 혼자 취사도구, 음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배낭을 1 시간 밖에 질 수 없었고 L군이 대신 짊어졌다.

미안하지만 하룻강아지는 지리산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는 95년 11월 5일 성삼재 임걸령 피아골 코스였다. 그러니 천왕봉을 몰라도 한참 모르며 백두대간에 참여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 가서 왼쪽 무릎 부근 근육에 이상이 생겼다. 배낭 무게, 보폭, 호흡, 주행법 아무 것도 몰랐으니(지금도 모르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몇 시간 늦은지도 모르고 정상에 오르니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체촬영하고 기진 맥진, 기다려준 선후배가 고마운지 뭔지 모른 채 나는 암담했다. 벌써 망가졌으니 장차 이를 어쩌랴!

고민할 시간도 없이 선두는 출발하고 나는 따라가야만 했다. 뒤 따라 가는데 나는 자꾸만 쳐진다. 쳐지고 쳐지고 앞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이게 웬일이냐? 평지를 갈 때는 다리가 아프지가 않은 것이다. 아! 이게 오를 때, 내릴 때, 평지를 걸을 때 다른 근육이 움직이는구나! 나는 알아채린 것이다. 그렇다면 평지는 빨리, 오르내릴 땐 쉬엄쉬엄, 스틱, 무릎보호대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나는 따라갔다.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며 중간에 L군이 버너와 깡통 2개를 자기 배낭에 옮긴 것만 기억난다. 벽소령에 가서야 나는 이성을 찾을 수가 있었다. 술 좀 마시니 마음이 편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리가 괜찮은 것 같다. 아침 산이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산중에서 자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그것도 지리산에서. 다시 행군은 시작되고 1시간도 안돼 다리는 다시 아파 온다. 어제보다 더 아프다. '평지는 빨리' 수법도 안 통한다. 결국 S군이 내 배낭을 짊어진다. 연하천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리하여 하룻강아지는 무사히 백두대간 1, 2차 지리산을 완주한 것이다. 내가 완주한 것을 축하하려 K선배 J선배가 떡을 준비하셨다. 떡이며 막걸리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아직도 지리산, 설악산 얘기를 하면 못 알아 듣는다. 아직 몇 번 안 가봤기 때문에 지명을 모른다. 남들은 어디서 어디로 어디까지 하면 응! 하며 알아듣는데, 나는 지명을 기억했다가 집에 와서 지도를 펴들고 다시 복습해야 이해가 간다. 그리고는 몇km인지 고도는 어떤지 공부를 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 하룻 강아지인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나는 왜 우리가 가깝게 친해지는지를 알게 됐다. S형의 장딴지, J형의 끈기, H형의 아량, N군의 과묵, I형의 노련, T군의 겸손을 나는 배우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