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

이익효(11회: 산우회 고문; 백두대간종주 시작시 산우회 회장)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우리의 백두대간 행사는 조국의 국토를 옳게 인식한다던가 통일조국의 미래를 준비한다던가 하는 관념적이고 애매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번 행사는 단순히 고교동문 등산회에서 기획한 등산에 주 목적을 둔 백두대간 종주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고 산우회의 백두대간종주는 계획부터가 거창하지 않았고 몇몇 선후배의 제의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겠다. 1996년 7회 정재우선배로부터 서울고 총산우회에서 백두대간을 시도해 보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이것이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해 킬리만자로 등반 계획이 이미 잡혀 있어 백두대간 계획은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던 차 정선배로부터 당신 자신도 킬리만자로 산행에 참가할 것이며, 그때 구체적인 백두대간 종주계획을 갖고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때 내 느낌은 정선배의 의지가 여간 굳은 게 아니어서 좀처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지를 접하면서 백두대간 종주야말로 한번 해 볼만한 행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종주 실행을 위해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첫째가 등산에 따른 기술적인 사항이었다. 후에는 정선배님(후에 백두대간 단장)을 비롯해서 전문가 이상의 등산지식과 열성을 가진 회원들이 많아 전혀 문제되지 않았지만, 계획 당시로서는 가장 우려되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서울고 산우회 내에는 이미 13-14회를 중심으로 몇 기에 걸쳐 가끔 모이는 산행 그룹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그룹에는 당시 전체 산우회의 중심 기수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번 킬리만자로 등정행사에 여러 명이 참가한다고 했다. 만약 이들이 백두대간 행사의 주력이 되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에서 14회 장헌수동문에게 접근해 보았다.

나는 킬리만자로 등정 예비모임 장소인 만강홍에 나아가 내가 몇 회 아무개인데 현 산우회장이라 소개하면서 이번 여행에 많은 협조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으며, 우리는 등정기간 중 늘 의기투합한 선후배로 킬리만자로 등반을 끝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어서 진행된 백두대간종주에서도 역시 그들은 중심 역할을 잘 해주었고 공헌이 지대하였다.

다음 문제는 비용이었다. 나의 소극적 의견으로는 평균 15-20명 정도의 행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적을 때에는 개인 소유의 봉고차를 쓰기로 하고, 많을 때는 버스를 빌린다 해도 3년간 이래 저래 약 2천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2천만원의 비용은 어떻게 하던 자체적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초대 산우회장이 김문현선배의 주장이 늘 남의 도움을 가급적 받지 않는 것을 서울고 산우회의 전통으로 하자는 말씀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년간 2천만원을 마련한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것 때문에 계획을 못 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시행키로 하고 날짜를 정했다.

세상에 무슨 일을 하다보면 생각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 법인데, 이번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첫날부터 우선 참석 인원 규모부터가 예상 밖이었다. 첫날 참석 인원은 58명. 결과적으로 대간종주는 예상보다 엄청나게 커진 행사가 되었다. 매번의 대간 종주에 예상보다 2-3배의 인원이 참석하여 시종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 도중 어찌 된 일인지 비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원 중 개인적인 찬조금을 내는 회원도 있었고, 총동창회에서도 우리 산우회 행사를 높이 평가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교통비를 포함한 직접 경비를 회원들이 十匙一飯으로 자발적으로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첫날부터 너무나도 감사한, 기대 이상의 산행이 진행되었다.

첫 구간 1박 2일의 지리산 종주코스 참석 인원 58명.

버스 2대의 발대식 겸 첫 산행이 시작되었다. 새벽 천왕봉에 도착하자 24회 최종호 동문이 누구라는 대상도 없이 온 천지의 햄들에게 외치는 "여기는 서울고등학교 백두대간팀의 천왕봉 정상 등정"을 알리는 외침은 바로 우리들 산행의 성공을 선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1박 2일의 지리산 종주는 처음 만나는 동문들이 많았던 당시 상황에서 동문 산우들의 만남을 반가워하고 서로를 격려하는데 더 할 수 없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첫날 고된 산행 끝에 저녁시간이었다. 처음 보는 18회 현철수동문이 슬며시 다가와 자기는 백두대간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 하겠노라고 했다. 나에게는 그 이상 더 없는 격려였으며, 이틀째 산행이 끝날 무렵 전날 참석치 못했던 10회 김일웅, 지경득 두 동문께서 시루떡 반 말을 나눠지고 올라왔을 때 동문 간에 느끼는 감정은 그리 흔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작과 동시에 질서가 서서히 잡혀갔다. 단원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으로 뭉쳐지고 있었고, 자기가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백두대간 산행 도중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모든 단원들의 실력이 고르지는 못했다. 산행에 별로 경험이 많지 않았던 회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했고, 후배들과 똑같이 해야 하는 연로한 선배들의 문제는 체력의 열세였을 것이다.

한 여름의 고된 산행으로 식욕을 잃고 물만 마시며 10여 시간을 버텨야 한다던가, 주말 산행을 마치고 출근하면 눈의 부을 정도로 과로를 느낀다던가 하는, 각자가 느끼는 어려움은 주위의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선두그룹과 후미그룹이 저절로 형성되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후미를 책임지는 단원이 생기고 실력에 따라 자기의 등산계획을 잡아나갔다.

정재우단장님과 장헌수대장의 헌신적인 봉사, 난관이 예측되는 구간마다 답사를 위해서 두 번씩 산행을 해야 하는 그분들의 격무 덕에 회원들은 아무 걱정 없이 산행만 하면 되었다.

대회 참석인원부터 버스 대절 비용 염출에까지 치밀한 계획으로 거의 허점을 보이지 않은 최치석동문. 또 그의 유머와 선후배 대원을 감싸는 너그러움.

발군의 등산 실력으로 동문들의 산행 안전을 늘 걱정해주던 김진수동문.

의무감답게 정상주를 늘 챙기던 김승남동문.

헌병감임을 자처했으나 전체 분위기를 살리려고 헌신적이었던 김종교동문.

자신의 보이지 않는 헌신에도 불구하고 선배들로부터 전혀 오해를 받아 왕따를 당하고 있음을 못내 섭섭해 하던 김완순동문 등.

수호지에 나오는 백팔두령을 방불케 하는 각양 각색의 인물들이 벌이는 실제 연기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추억이다. 등산이 끝날 무렵 동문들의 산행 실력은 평준화되었고, 전 대원들의 등산실력, 등산예절 등 모든 면에서 수준급이 되었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도 백두대간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를 얻었다. 우선 산행 실력이 늘었다. 우연히도 백두대간 3년 기간 전후에 일본 알프스라 일컫는 3200미터 급 槍岳과 穗高岳을 종주할 기회가 있었다. 8년 전 등산했던 때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에 비추어 볼 때, 2000년 9월 초의 산행에서는 시간도 단축되었고, 별로 어려움 없이 등산을 끝낼 수 있었으니 실력이 향상된 것이리라.

다음으로 등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었다. 등산은 체력을 연마하는 단순한 스포츠 이상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고양감과 동반자들과의 유대감을 깊게 해주기도 한다. 스포츠라 하더라도, 단연 최고의 스포츠임에 틀림이 없다.

마지막으로 동창들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고등학교 동창은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관계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3년 간의 내 생활은 평소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협동과 일체감과 정기적으로 느끼는 흥분과 기쁨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내가 늘 갖기를 원하는 또 다른 방을 하나 더 얻은 것 같다.

백두대간 전 대원의 노고와 성취에 축하를 드린다.

또한 동창회의 전폭적인 지원에 감사드린다.

서울고등학교 백두대간팀 만세!